"...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조인희 씨." 분명히 얼마 살지 않은 아이의 부드러운 입술. 그 입술의 양 끝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 올라간다. 터덜터덜, 같은 방향을 보고 걸어 올라가는 길에 일제히 가로등 불빛이 들어왔다. 인희는 미소가 걸린 수하의 입술을 제 입술로 삼켜도 미소가 유지될까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가락으로 수하의 부드...
손 틈으로 안개가 흘러내리는 밤이다. 낮의 태양이 세상을 찢을 듯 날카롭게 쏟아지고, 태양의 열기에 호수의 물이 전부 공기 중으로 증발한 것처럼 습한 날이면 유독 그 밤의 안개는 짙었다. 방학에도 학교에 남은 사람들이 겨울도 아닌 여름의 밤을 두려워하게 만들 정도로 뚜렷한 질량을 가진 안개를 뚫고, 은빛의 숄을 두른 것 같은 모습으로 오솔길을 걷는 한나의 ...
1.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온전히 숨기지 못하던 도영을 만났을 때, 여명은 코가 동그랗고 반짝거리는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 구두의 버클에 얼핏 봐도 값비싼 브랜드의 로고가 걸려있는 것을 보며 도영은 꽤 팔자 좋은 꼬맹이라는 빈정거림을 애써 지우려 노력해야 했다. 그 때의 도영은 누군가의 호의로 송두리째 바뀐 자신의 인생에 무한히 감사해 하면서도...
* 김은비 시집, <사랑하고도 불행한> 1. 그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봄은 사뿐히 걸어온다. 가끔 비틀거리는 모양으로 걷긴 하지만. 봄은 잠이 덜 깬 상태로 다시 베개에 뺨을 댔다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자신의 의무임을 자각한 것처럼 눈을 반짝 뜬다. 미애야아. 우응, 잘 잤어? 부름과 질문이 얽히는 순간으로 시작하는 하루가 너무나도 일상적이라...
눈이 그치고 해가 떴다. 어제까지는 눈 위로 눈이 내려 겨울이 한껏 몸집을 키우느라 온 세상이 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술과 음식은 충분해서, 저택 안의 하인들은 눈폭풍이 마른 덤불을 할퀴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떤 가게도 열려있지 않을 것 같다고 쑥덕거렸다. '저 밖으로는 서리 할아버지와 함께 간다고 해도 돌아오지 못할 거야.' 누군가가 중얼거렸고 끄덕인 사...
0. 숨소리가 고동 소리가 맥박 소리가 수학자의 귓전에 함부로 들락거린다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 中 1. 증명을 위해서는 가정이 필요하다. 가정이라고 하는 흐릿한 덩어리를 날카롭게 조각하고 틈을 메워 흠 없는 답으로 만들어 내는 증명의 과정. 증명 앞에 가정이 놓인다는 것은 증명을 해내는 사람들의 영혼 일부분...
서영락이 남자에게 건넨 목줄에는 아무런 글자도 적히지 않은 인식표가 달려 있었다. 다치지 않도록 부드러운 가죽을 사용한 목줄이 마음에 들어 손으로 쓸어보던 청의 눈에 빈 인식표가 들어왔다. 서영락은 의문스러운 시선에서 읽어낸 물음에 담담하게 답했다. 적을 이름이 없어서요.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모로 기울인 목줄의 주인은 이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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